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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4) <br>분청사기마상배편이 작은 감동과 즐거움만이라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 중에는 마상배(馬上杯)라는 것이 있다. 별도의 굽 없이 곧게 선 긴 다리가 몸체로 연결되는 팽이 모양의 잔으로 일명 고족배(高足杯)라고도 한다. 마상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단독 기물이 아니라 잔받침과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추정은 조선 후기 백자에 유독 다리가 긴 잔이 있어 잔받침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잔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잔에 달린 다리가 긴 것으로는 삼국시대 고배(굽다리접시)에서도 볼 수가 있어 그 유사성이 주목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면 마상배란 무슨 뜻인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를 보면 굽이 상상외로 높다보니 불안정한 면이 있어 손으로 잡고 사용하기 때문에 마상배라는 속칭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굽이 높다보니 말 위에서 손으로 잡고 사용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다. 하지만 논리적 근거나 어원을 찾기 어려워 마상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보다는 굽 높은 잔의 일종으로 여기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까지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 마상배로 통용될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청사기마상배편은 기존에 알려진 마상배의 기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높은 굽에 잔이 올려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밖으로 벌어진 접지면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으며 음각선이 보이는 높은 굽은 잔으로 연결되고 있다. 잔의 외면은 아래 위 로 선을 돌려 단을 구분한 후 그 안에 세로로 흑백상감을 교차해 문양을 넣고 있어 심플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외면은 아래위로 다소의 여백이 있는 반면 내면은 문양이 빈틈없이 꽉 차 있다. 우선 중앙에는 원 안에 세 점의 국화를 배치하고 있으며 이를 여의두문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는 입술 부분에 이르기까지 빽빽하게 우점문을 삽입하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 세 곳에는 간략화 된 흑백상감의 학 문양을 넣고 있다. 입술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남은 형태만으로도 고급의 깔끔한 분청사기 마상배였음을 알아 보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형태며 문양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마상배편을 언제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가마터에서 인연을 맺지 않고 시중에서 구입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아쉽지만 현재로서는 산지 추정은 불가능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인데 근래 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찾은 것이다보니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늘 새롭고 신선하게, 매일을 그렇게만 살 수 있고 그렇게만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분청사기마상배편이 보여 준 이 작은 감동과 즐거움만이라도 감사하고 또 소중히 여겨야 하는 습관을 늘 길러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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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3) <BR> 백자철화편병편과 수물(受物)편같은 백자가마터 출토품이라는 것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편병은 병을 만든 후 앞과 뒤를 누르거나 두드려 면을 만든 그릇이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든 기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전기 것은 마치 몸통이 접시 두 개를 붙여 놓은 듯 옆면이 좁은 편이며 후기 것은 분청사기에서 보이는 형태처럼 둥글고 편평한 모습이다. 후기 쪽으로 가면서는 크기 또한 커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기도 광주시 송정리 백자가마터는 꽤 여러 곳이 알려져 있다. 그 중 두 곳이 발굴이 되었는데 한적했던 이곳에 시청이 들어서면서 긴급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간지를 통해 송정리 백자가마터는 1649년에서 1653년경에 도자기를 제작했던 관요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선동리를 이은데 이어 유사리로 연결시키는 17세기 중간 시기의 것임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마터가 시청이 들어서면서 뭍혀 버린데 반해 1호 가마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마차길과 무덤 사이 단애에 퇴적층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시청 뒤편 주차장을 나서면 바로 문밖에 위치하게 되어버려 옛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백자철화편병편과 철화수물편은 모두 송정리 1호 백자가마터에서 오래 전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80년대 무렵으로 기억이 되니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다. 이처럼 오래 간직해 오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백자철화편병편은 고운 태토에 기벽은 얇은 편이며 굽다리가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백자철화편병편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철화로 그려진 대나무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무심하게 툭툭 친 듯한 대나무 그림은 농담을 주어 선명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가 살아있었더라면 대단히 아름답고도 우아한 편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백자철화수물편은 남아 있는 부분이 작아 어떤 기형이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유약도 없는 초벌구이인 것도 아쉬운 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철화로 씌어진 두 글자다. 하지만 수물(受物)이라는 글자가 어떤 물건을 받거나 어떤 물건을 받고자 한다는 뜻인지 전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두 글자만이라도 이처럼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에 오히려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도자기를 통틀어 나는 아직까지 수물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을 어디서고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나름으로는 귀중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연재를 하면서 한 점이 아니라 이처럼 이질적인 두 점을 함께 소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따로따로 소개하기에는 무언가 미진해 보이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점 모두 같은 송정리 백자가마터 출토품이라는 것도 한 몫을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같은 시기 백자철화편병편은 미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철화수물편은 자료적인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힌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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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2)<br>분청철화어문병편쏘가리 문양 도편 한 점 없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계룡산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조선 왕도로서의 도읍지를 생각한다면 무학대사를, 민속신앙의 터전을 염두에 둔다면 신도안을, 마음이 아픈 이야기가 가슴을 적셔온다면 달래고개의 전설이 연상되지 않을까. 그러나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분청철화가 눈 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그만큼 계룡산 밑 학봉리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는 분청철화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무안이나 운대리 같은 곳에서도 분청철화가 간혹 보이기는 히자만 미미한 것이어서 계룡산이나 학봉리로 지칭되는 이곳의 대규모 분청철화와는 어짜피 비교 자체가 남새스러운 일일 것이다. 계룡산 밑 학봉리 가마터에서는 물론 분청만 만든 것은 아니다. 흑유도 있고 백자도 있다. 하지만 분청철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곳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계룡산 분청사기 가마터에서는 분청철화를 얼마나 만든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막연하게 많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발굴조사 등을 통해 밝혀진 자료를 보면 막연히 짐작했던대로 그 수량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출토품의 시문기법을 살펴보면 상감이 0.46 인화가 0.60 조화가 0.04 귀얄이 9.59에 분청철화가 무려 13.36프로나 되니 압도적으로 엄청난 수량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계룡산 분청사기 가마터 하면 분청철화가 연상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계룡산에서는 귀얄기법과 더불어 분청철화가 가장 다양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기종으로는 대접 접시 완 종지 등의 반상기류와 병, 호, 항, 대발, 제기, 마상배, 장군, 편병, 자라병, 연적 등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도 병과 항의 수량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러 기종에 시문된 분청철화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물고기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고기 두 마리를 엇갈려 배치하는 쌍어문, 연못 풍경 속의 물고기, 등용문과 관련된 어룡(魚龍)과 파룡(波龍) 등이 그 것인데 몇 줄의 가는 선으로 날카롭게 펼처진 등지느러미와 뾰족한 주둥이가 특징으로 추상적인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분청철화어문병편은 앞에서 지적한 계룡산 분청철화어문의 특징들과는 맛을 달리하고 있어 주목된다. 수초 밑에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머리와 앞지느러미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선은 둔탁하고 형태도 세련되지 못해 못 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 때문에 오히려 독창적인 분청철화물고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면 나만의 독단일까. 이 분청철화어문병편은 안쪽으로 한 줄기 유약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어 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 추상문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계룡산 분청철화의 쏘가리 문양 도편 한 점 없이 분청철화어문병편을 이야기 하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서운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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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국문화원 10개소, ‘한글 문화상품 특별전’ 개최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한글박물관, 한국교육문화재단은 이달부터 오는 10월까지 10개국* 해외 한국문화원에서 ‘한글 문화상품 특별전’을 개최한다.캐나다(4월), 튀르키에(5월), 독일·멕시코(6월), 베트남·필리핀(7월), 상해·인도(9월), 남아프리카공화국·스웨덴(10월) 올해로 3년째를 맞는 ‘한글 문화상품 특별전’은 한류의 근간인 한글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과 수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2022년 1개국(프랑스), 2023년 4개국(카자흐스탄, 오사카, 홍콩, 아르헨티나)에 이어 올해 10개국으로 대폭 확대해 개최된다.올해 첫 전시는 4월 26일부터 6월 28일까지 캐나다 오타와에 소재한 캐나다한국문화원 KCC갤러리에서 열린다.이번 전시에서는 공모전(2019년~2023년)을 통해 발굴된 참신한 한글 문화상품 31종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 작품으로 △도자기류(한글 패턴 팔각화병 시리즈 등) 4종 △게임 및 교구재(한글 창제원리를 적용한 ‘한글이 그크끄’ 시리즈 등) 9종 △패션 및 주얼리(천지인 확대경 목걸이 등) 6종 △기타 생활소비재(세종의 정신과 한글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방향제 ‘세종1446’ 등) 12종 등 다채로운 콘텐츠와 문화상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전시 이외에도 관람객들에게 한글 블록, 도미노 게임 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26일 개막식 당일에는 문화원에서 50명에게 한글 문화상품 증정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한글박물관 안승섭 기획운영과장은 "세계인이 한글을 친근하고 재미있게 접해보는 계기가 되도록 문화원 전시를 다각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며, K-culture의 뿌리로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의 가치가 세계에 확산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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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39)<br>분청귀얄잔편정겨운 대화라도 나누어 보고만 싶어지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 용어 중 킨츠기란 것이 있다. 일본말이다. 금이 가거나 깨지거나 파손된 부분을 옻으로 붙이고 수리된 곳을 금색 은색 붉은색 등으로 장식하는 수리 기법을 말한다. 요비츠기란 말도 있다. 이 것은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을 아예 다른 도자기 파편을 붙여 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쪽 일부에서 킨츠기란 용어를 쓰고 있고 실물도 더러 볼 수 있다. 훼손된 부분을 같은 종류의 도편을 이용해 접합해 수리한 것들인데, 진해 두동리 다완이나 분청덤벙에서 그런 예를 더러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킨츠기보다는 요비츠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요비츠기의 경우 백자에 청자를 대입시킨다던가 해서 전혀 색다른 이질감 속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여기 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킨츠기건 요비츠기건 손상된 기물을 천대시 하지 않고 새로운 미감을 찾아내려는 노력이야말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근래 구입한 분청귀얄잔편은 킨츠기일까 요비츠기일까. 같은 종류의 분청으로 수리를 했으니 킨츠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기물을 붙인 것이니 요비츠기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 싶다. 분청귀얄잔편은 고흥 운대리 산이다. 굽은 5Cm고 입지름은 넓은 쪽이 13.5에 좁은 쪽이 11Cm로 깔때기 같은 일그러진 모습이다. 굽은 내화토빚음받침에 주변은 암갈색이다. 분은 일차적으로 엷게 칠한 후 그 위 입술 부위에 다시 두터운 귀얄을 한 듯 백토가 흘러내린 부분도 보인다. 안쪽도 같은 구조다. 암갈색의 내저에는 내화토빚음받침의 흔적이 보이며 귀얄을 엷게 칠한 부분과 짙게 칠한 부분이 겹쳐 보인다. 손상을 입은 입술 부위는 다른 분청편을 붙여 옻으로 수리를 해놓고 있다. 분청귀얄잔편은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일그러진 모습이다. 따라서 흡사 음료를 따르기 위해 일부러 한 쪽을 찌그러지게 만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암갈색의 바탕과 귀얄이 엷은 곳과 짙은 부분이 어울려 경색이 뛰어나다. 따라서 향기로운 차라도 한 잔 이곳에다 마시다 보면 그야말로 맛과 멋과 향기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찻자리가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불량품에 불과한 손상 입은 기명에 다른 기물을 붙여 정성스럽게 수리를 한 것도 그런 찻잔으로서의 역할과 쓰임을 염두에 두고 배려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청자든 분청이든 백자든 완전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 것은 그 것대로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많은 세월에 걸쳐 부대끼다 보면 다소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들조차도 보듬어 안고 아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조금만 손상이 있어도 기피 현상이 너무도 심한 것이 오늘의 추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도 이제 킨츠기나 요지츠기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분청귀얄잔편을 다시 한 번 선입감 없이 바라보자.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분청귀얄잔편은 너무도 경색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 잔에 향내 나는 차라도 한 잔 따라 마시며 그 누군가와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어 보고만 싶어지는 그런 아쉽고 그리운 시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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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7) <br>분청덤벙준편덤벙의 경우는 삼벌구이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초기 청자나 하품의 도자기가 아니면 초벌구이는 흔치 않다. 테토를 빚어 성형을 해 초벌구이를 한 후 유약을 입혀 재벌구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도자기 소성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한 후 한 번 더 소성을 한 삼벌구이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더구나 외국의 경우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그런 도자기가 있다고 한다면 궁금증은 더욱 높아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일반인이 아니라 보성에서 분청덤벙 재현을 위해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고 있는 도예가의 주장이라고 하면 한 번쯤 귀 기울여 볼 필요는 있는 것이 아닐까. 방법은 이렇다고 한다. 즉 성형을 한 기물을 초벌구이를 한데다 덩벙질을 한 후 재벌구이를 한다. 그런 후에는 유약을 입혀 다시 삼벌구이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중국에도 유례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이러한 소성방법은 왜 필요한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또 이렇다. 초벌구이를 한 후 덩벙질을 하고 유약을 입혀 재벌구이를 할 경우 삼투압에 의한 기물의 주저앉음 현상이 생기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재벌구이만을 할 경우 덤벙이 아닌 반덤벙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덤벙의 경우는 삼벌구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삼벌구이는 비용과 시간과 노력이 배가되다보니 보성 도촌리와 고흥 운대리의 분청덤벙은 그 제작기간이 30여년에 불과한 일시적인 제작방법으로 보여진다는 주장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분청덤벙의 이와 같은 삼벌구이의 주장에 대해 나는 아직 어떠한 결론도 갖고 있지를 못하다. 오래 전 도촌리와 운대리를 답사한 적이 있고 두 가마터에서 출토된 비교할만한 분청덤벙편도 조금은 갖고 있지만 상기 주장에 대해 나로서는 판단을 내릴 그 어떤 자료도 근거도 갖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벌구이라는 새로운 주장 때문이었을까. 자료를 찾다보니 다시 꺼내 들게 된 것이 분청덤벙준편이다. 분청덥벙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보성의 도촌리와 고흥의 운대리를 떠올리게 된다. 보성이야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널리 알려져 왔지만 고흥은 근래 들어 가마터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오히려 그 평판이 보성을 능가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충청도와 전라도 장흥 등지에서 분청덤벙이 발견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까지는 미미한 형편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런데 보성 도촌리와 고흥 운대리의 분청덤벙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비교적 백분이 곱게 입혀지는데 반해 후자 쪽은 조금 거친 느낌이 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분청덤벙준편은 다리 부분만 남은 것으로 상준이나 희준인 것만은 분명한데 어느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남은 것이 다리 한쪽이다 보니 머리가 없는 상태에서 상준과 희준의 구별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핸디캡을 제하고 나면 남은 도편만으로도 대단한 기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남은 몸체 일부를 떠받치고 있는 지름 5.5Cm의 우람한 다리 형태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큰 기물이었는지 짐작 자체가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큰 기물 전체에 덤벙을 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덥벙은 피부 자체가 거칠어 고흥 운대리 보다는 보성 도촌리 것으로 보이는데 여하튼 크기며 덤벙이며 모두가 흔하게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비록 다리 한 쪽만 남은 불구의 몸이기는 하지만 감탄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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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6)<br> 백자철화제기보편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이규진(편고재 주인) 할고대라고도 불리는 쪽굽에 돋을무늬 같기도 한 연주문 등이 있는 등 전형적인 17C 관요산 제기의 일종인 백자철화제기보편이다. 보는 곡식을 담아 놓는 제기로 둥근 형태에 귀가 달리고 주로 동으로 만들지만 백자도 있다. 백자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17C로 와 개선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제기 중의 하나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도편은 일찍이 지인에게서 양도를 받은 것으로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쪽굽에 양각의 연주문과 그리고 음각의 초화문 등은 상림리 외에도 선동리 등 17C 관요에서 더러 보이는 백자보의 특징이다. 내게는 이러한 도편이 여러 점 있다. 그러면서도 지인을 통해 이 도편을 입수한 것은 철화무늬 때문이다. 17C 백자에서 철화란 흔히 볼 수 있는 장식기법이다. 임란 후 도자기 산업의 급격한 몰락과 구입의 어려움에 따른 청화의 소멸은 대용품으로 철화의 등장을 강요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자철화제기보편에 대한 내 지극한 관심은 단순히 철화가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는 세로로 붙어 있는 연주문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들어 있는데 초화문의 정확한 종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추초문 같은 느낌이 들고는 한다. 추초문이라고 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즉 금사리 시기 몇 줄의 선을 청화로 그려 넣어 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도자기 애호가들을 매료시키는 그 추초문 말이다. 그런데 백자철화제기보편의 철화무늬가 바로 이를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안료는 달라도 이러한 17C 철화무늬가 18C 청화무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흥미롭고도 귀중한 자료이겠는가.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광주시 일원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가마터 중에서도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도를 벗어나 마차 길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드문드문 민가가 있는 곳이 바로 상림리인데 이곳에도 백자 가마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굽 안에서 보이는 간지로는 신미(辛未,1631) 계유(癸酉,1633) 등이 출토되고 있어 17C 관요 중에서는 탄벌리 다음으로 이른 시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에서는 청화는 물론 없고 철화가 보이지만 이 또한 흔치는 않다. 더구나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무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여간 귀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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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7)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덤벙분청'에 대한 변명||"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얼른 생각하기에는 신분도 높고 지혜도 뛰어난 오키의 도공들이 만든 품위 있는 다기가 훨씬 뛰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잡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일 것이다. 즉 밖으로만 모방할 뿐 안으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새삼스럽게 조선인처럼 가난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고 또한 잡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맛에 사로잡힌 부자유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참된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아직은 조작이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애의 상태에서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조선인의 장점을 이은 선어(禪語)를 빌려 말한다면, 지미(只縻)의 경지에서 만들었다는 점에 있으며,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미묘한 갈림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과 그 예술'에서 말한 내용 일부다.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 2022)의 한 챕터에서 이를 베껴둔 것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 혹은 해명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내는 것이 달마도의 회화며 분청의 세계가 어찌 다를 것인가.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라 했다.불교의 공(空), 도교 자유의지의 표현 말이다.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에 표현되었으니 그 웅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오래전 내가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란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무안분청(광주,전남을 포괄하는 호명 방식)의 기능을 배태한 무안만(내가 새롭게 구상한 영산강과 인근 바다의 다른 이름)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 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무안만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과 지향 속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남도 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자기에서 무안만의 분청까지, 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정신 말이다.덤벙분청의 세계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6세기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세종 이후에는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에 이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된다. 16세기 이후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가 조선의 분청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고 평한 것은,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다. 이중 무안만에서 가장 선호했던 기법이 덤벙과 귀얄문이다. 지면상 고(古)덤벙에 대해서만 간략히 소개해둔다. 더 자세한 얘기는 졸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덤벙 채식(彩飾)은 도자기 장식에서 백색이나 색깔이 있는 흙물에 도자기를 덤벙 담갔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물에 어떤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다. 텀벙, 덤버덩, 덤벙, 덤벙덤벙, 덤버덩덤버덩, 담방 등의 용례가 있다. 하지만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자꾸 함부로 서둘러 뛰어든다는 뉘앙스의 '덤벙'이란 의미로 읽는 것은 단견이다. 담방담방이나 담방은 작고 가벼운 물건이 물에 떨어져 잠기는 소리를 말한다.둥덩둥덩이나 동당동당과 같은 말이다. 남도민요 둥덩애타령이란 호명이 여기서 나왔다. 옹기 옴박지에 물을 절반쯤 채우고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엎어 손으로 두드리면 동당동당 혹은 둥덩둥덩 하는 타악기 소리가 난다. 이를 '옴박지 장단'이라고 하고 특히 여인네들이 유희놀음을 할 때 이를 악기 삼아 노래했기에 '둥덩애타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덤벙은 '연못'의 방언이기도 하다. '웅덩이'를 '둠벙'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둠벙과 덤벙의 어원이 같다. 따라서 덤벙채색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덤벙댄다는 뜻이 아니라, 보다 생태적이고 고풍스런 뉘앙스다. 예컨대 '덤벙주초'는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두는 주춧돌을 말한다. 다듬지 않아서 거칠지만 그 질감이 주는 친자연적인 미감에 의미를 두는 시선이다. 야마다가 무안의 분청을 황실의 국보로 찬양하고 야나기가 조선의 옹기와 도자기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귄대가리의 정체지난 칼럼에서 나는 거시기 연대기를 말하며 귄의 정체를 해명했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선 결과가 다른 것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땔나무꾼으로서, 적어도 누군가는 이 흐름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일종의 팬덤이었나? 생각 없이 덤벙대는 우둔한 자들이어서인가? 잘못된 행위를 극구 우김질하자는 게 아니다. 역사이래 거시기를 공유해온 사람들의 더불어 울림(共鳴)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지난 수 세기 동안 죽음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남도로 또 남도로 향했는가를, 또한 남도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수용하며 슬픔을 삭여냈는가를 말이다. 그래서다. 오늘 분청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감에 대한 것이다. 두렵고 화가 나는 것은, 현 집권당 특히 남도지역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태도와 안이한 처신이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당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지 당신들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 아니다. 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일본인들처럼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도 않고 헛되이 치장하지도 않는다. 단 한 표 차로 졌어도 진 것은 진 것이다. 이것이 게임의 원칙이다. 나중 호모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을 소개할 예정이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는 것이 옳다. 요한호이징하는 그래서 종교와 전쟁도 놀이라고 했을 것이다. 경기에서 졌으면 '졌잘싸'로 변명하지 말고 협력하는 것이 정도다. 지금은 그것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할 일이다. 야나기에 비유컨대 여기가 미묘한 갈림길일까? 남도의 일당 정치인들에게 경고해둔다. 거시기의 연대를 몰상식하게 폄훼하면 나부터라도 가만있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나라의 의를 위해 떨쳐 일어나고 시대정신을 견인해 나온 남도사람들의 시대정신과 귄진 감각을.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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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4) <br> 백자명기철화말편기마민족의 일원이라도 되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린다. 거칠 것 하나 없는 일망무제의 끝없는 초원을. 고구려를 생각하면 왜 말탄 무사가 떠오르는 것일까. 차도 비행기도 없던 시절, 드넓은 영토를 내달리자면 말 말고 이용할 수 있는 더 빠른 교통수단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렇다보니 동북아를 호령했던 대제국 고구려와 말의 연관성을 생각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기마민족설이라는 것도 있다. 1948년 일본의 에가미에 의해 제기된 주장이다. 고구려에 가까운 통쿠스 계통의 기마민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해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후 기마민족은 4세기 초 현해탄을 건너 북규슈 지방에 상륙하여 현지의 정치세력을 병합해 한,왜 연합왕국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 세력은 다시 4~5세기경 일본 내지로 진출 강력한 고대왕국을 수립하는데 이 것이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 이 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지만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마민족이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가야토기 중에는 의외로 말 형태의 것이 많이 보이고 있어 기마만족설과 혹시나 하는 연관성을 떠올려 보게 되기 때문이다. 가야 등에서 많이 보이던 토기 말은 조선조로 오면 백자 명기에서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명기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도 평안하기를 바라며 무덤에 넣어 주는 기물들을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실생활용품 도자기 대신 일부러 작게 만든 명기를 사용하는데 사발 접시 합 병 호 향로 대야 등은 물론 인물과 말과 가마 등도 만들어진다. 장난감 같이 작게 만들어지는 명기는 소꼽이라고도 하는데 지석과 함께 넣어져 당시의 시대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말은 명기 중에서도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말은 피장자의 영혼을 싣고 승천한다고 믿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죽음이 환생으로 이어진다는 바람 때문에 부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백자명기말. 그 것도 제대로 된 철화가 들어간 백자명기철화말을 한 점 갖고 싶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것도 무슨 큰 인연이라고 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깨진 도편도 내게는 차지가 돌아오지를 않았었다. 몇 개월 전에는 지인 중에 일부가 깨져 달아난 백자명기철화말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몹시 마음에 드는 명품급을 갖고 있어 관심을 가져 보았지만 수리를 해 고가에 파는 바람에 아쉽게도 헛물만 켜고 만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 우연한 곳에서 발견을 하고 작심 끝에 구입한 것이 바로 백자명기철화말편이다. 백자명기철화말편은 현재 머리가 없고 꼬리 끝이 잘려 나갔는가 하면 네 개의 다리 중 한 개가 달아나고 없다. 그래도 원형을 유지한 채 똑바로 설 수가 있는 것이 장점이다. 다리는 내화토 받침을 하고 있으며 긴 몸체 위에는 별도로 만들어 얹어 놓은 듯한 안장이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회색이 많이 도는 유색의 몸체와 머리부터 안장 등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말고삐와 끈 등을 철화로 장식해 놓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7C 지방가마에서 제작된 명기 중의 하나로 보여 진다. 고구려나 가야의 무사처럼 백자명기철화말편을 타고 내달리면 그 곳은 북방의 초원일까 낙동강 유역의 평원일까. 아, 오늘은 기마민족의 일원이라도 되어 어디론가 무작정 말이라도 달려보고 싶은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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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2) <br> 분청명문초벌구이접시편변함없이 내 궁금증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찾아 갈 수 있을까. 물론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 간다면 어디인들 못 찾아 갈 곳이 있겠는가. 하지만 옛 추억을 더듬어 기억에만 의지해 찾아 가라고 한다면 자신이 없다.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이 곳을 찾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로서 기억조차 아물아물하다. 그런데 그 아물아물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가마터는 마을 앞 중간 지점 밭과 민가 뒤편의 묘지 부근 등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충청도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C 전반에 운영되었던 곳으로 상감과 국화문의 인화기법, 그리고 선문의 접시와 대접 및 병 등이 제작되었던 곳이다. 갑발은 보이지 않으며 기물들을 포개어 소성한 것으로 보아 상품의 뛰어난 도자기들을 제작했던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연기군이었으나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에 소속되는 등 복잡하게 바뀌어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아물아물한 기억 속에서도 내가 이곳 가마터에 대해 추억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간직해 오고 있는 한 점의 도편 때문이다. 도편은 접시로서 초벌구이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토를 빚어 성형을 한 후 한 번 구워낸 것으로 아직 분과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하지 않은 상태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붉은 흙 기운이 그대로 살아 있다. 비교적 높은 굽 안쪽에는 다진 흔적이 보이는데 이 도편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저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연(延)자라고 할 수 있다. 예리하게 뾰족한 기물로 긁어내듯 음각을 한 것이 아니라 칼 같은 것을 약간 뉘어 각을 한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연(延)자는 내저 중앙에서 약간 위쪽으로 위치 아래쪽으로 이어져 한 글자가 더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 있었다고 하면 그 글자는 연(延)자와 합쳐진 지명이었을까.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추억만을 더듬어 지금 찾아 가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뛰어넘은 세월의 간극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득한 세월을 건너 뛰어 찾아 가더라도 분청명문초벌구이접시편을 만난 인연의 장소만은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연(延)자가 주는 호기심은 도편과 처음 인연을 맺은 오래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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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재단 '청룡의 해' 문화상품 발매한국문화재재단이 푸른 용의 해를 맞아 용(龍) 일러스트가 담긴 문화상품을 내놨다.박세은 작가와의 협업 작품으로 제작된 카드, 엽서, 소주잔, 마그넷 등이다.박 작가는 아기자기한 손그림과 감각적 색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일러스트 작가다. 이번 문화상품에는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이 박 작가만의 독특한 색채로 표현됐다.'용 덕담 꾸러미 카드 세트'는 우리 선조들이 다양한 문화유산에 남긴 용 문양을 차용해 카드에 디자인한 상품이다. 재치 있는 문구와 디자인이 각기 다른 카트 9장이 한 꾸러미로 구성됐다. '용과 궁궐 마그넷'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의 낮과 밤의 그림을 담아냈다. '청룡 소주잔'은 푸른 용의 모습을 담은 도자기 소주잔 2개로 구성된 상품이다.문화상품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내 사랑 문화상품관 등 오프라인 매장 9곳, 온라인 쇼핑몰, 글로벌(영문) 쇼핑몰 KCHFstore에서 구매할 수 있다.상품을 기획한 진나라 재단 문화상품실장은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상품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앞으로도 참신한 디자인의 전통문화상품을 지속적으로 개발·출시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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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1) <br>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에서는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같은 양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흥미로운 바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무리굽이다.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청자해무리굽완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처럼 굽의 접지면이 넓은 해무리굽이 조선 백자에서도 보이고 있으니 주목을 요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청자해무리굽완이 10C 것인데 반해 백자 해무리굽은 17C 관요에서만 보이고 있으니 무려 7배여 년의 간극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이치가 없고 보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채롭다 못해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해무리굽처럼 시대를 뛰어넘어 확실하게 같은 양식을 보이는 것이라고 단언 할 수는 없어도 비슷해 보이는 것은 또 있다. 이런 점에서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청에서 보이는 귀얄과 백자에서 보이는 청채다. 두 종류가 재료는 달라도 붓을 이용 칠을 해 농담의 효과를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각각 16C와 19C로 3백여 년의 시대적 차이를 감안한다면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은 굽과 몸체 일부만 남아 있어 아쉽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기물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향로가 분명해 보인다. 굽은 접지면이 밖으로 말린 형태로 마무리를 하고 있으며 능화형의 풍혈을 배치하고 있다. 몸체에는 음각으로 초화문을 장식하고 있으며 전체를 청채로 칠하고 있다. 붓칠을 한 청채는 농담이 그리 뚜렷하지는 않으나 음각의 초화문에는 색깔이 고여 문양은 비교적 뚜렸한 편이다. 이 도편을 기존에 알려진 유물과 비교를 해 유추해 보면 몸체 좌우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고 주구는 안쪽으로 턱이 지게 말려 있어 뚜껑을 덮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향로로서는 상당히 큰 기물에 속하는 것도 주목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C 분원리 산인 이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은 언제 인연을 맺게 된 것인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분원초등학교 좌측 민가 뒤편 골짜기에 그리 크지 않은 밭이 있는데 오래 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뭄체 안쪽은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굽 안은 백자 유약이 곱게 입혀져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청채가 좀더 붓자국이 선명해 농담의 효과가 강조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어찌 원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이랴. 어찌 되었든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을 보면서 분청 귀얄과 백자 청채가 주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양식에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바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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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0)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읊은 매화시이다. 매화를 노래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로 알려져 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골짜기는 필시 고려말의 혼란기를 뜻하는 것이다. 혼란의 구름이 머물러 있으니 눈 속에 피는 설중매를 마주할 길이 없다.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라의 혼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석양에 홀로 청청하게 서 있었다는 행간을 읽으면, 깊은 눈 속에 매화가 피어있듯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와중의 격변을 그려볼 수 있다. 그저 눈 속에 피는 한 송이 매화를 읊은 것이 아니다. 이색이 누구인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이 길은(吉隱)이다. 큰 스승님들이 지어주신 대여섯 개의 호를 나누어 쓰다가, 한 페친의 권유로 시방은 이 이름을 내 호로 사용하고 있다. 어찌 삼은의 언저리라도 갈 수 있겠는가만, 길하고 풍요로운 본질을 그윽이 품고 초야에 은닉해 남은 삶을 꾸리겠다는 마음만은 변함없다. 옛 선비들이 앞다투어 설중매를 노래하고 그 기운에 의탁해 세사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고자 했던 이유도 대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2008년경 본 지면에 소개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졸저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 한 대목을 다시 가져와 본다. "역학적으로 보면 겨울은 곤음(坤陰)에 해당한다. 시간을 분절하고 공간을 나눠 오행의 의미를 부여할 때 만물이 생장을 정지하는 죽음의 계절을 겨울로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해 뜨는 동쪽을 새싹의 색깔인 청색으로 정하고 해가 지는 서쪽을 색깔 없는 흰색으로 정하는 이유와도 같다. 그래서다. 매화는 죽음으로부터 소생하는 혹은 환생하는 재생의 꽃이다. 하고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단연 매화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고향 산은 아득히 음기가 서려 있고 대지의 바람은 차고 눈은 깊이 쌓였는데 창을 올리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 뜻을 보이네 삼봉 정도전이 노래한 '매설헌도(梅雪軒圖)'이다. 나는 이 시를 호우의 철학으로 풀이하여 정몽주가 읊은 봄비와 비교해본 바 있다. 겨우내 곤음의 동굴 속에서 검은 피와 붉은 피를 튀기며 새로 올 봄에 대한 혈전을 치렀을 그들의 심경을 읽어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삼봉 정도전은 이후 이성계를 도와 유교 조선을 기획하고 건국에 성공한다. 주역을 읽으며 올려다본 가지 끝의 흰 것, 그것이 새로 맞이한 삼봉의 봄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목은 이색의 시는 처량하기 그지없다. 분명 백설 잦아진 골 양지바른 어느 언덕에 설중매 만발했을 텐데, 기울어가는 석양을 홀로 바라보며 갈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고려가 망하지 않고 심기일전 불교와 무신권력을 혁명했더라면 목은은 눈 속의 매화를 발견한 기쁨을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삼봉을 승리자로만 읽는 것은 아니요 목은을 패배자로만 읽는 것도 아니다. 목은은 줄곧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다. 유교와 불교의 융합을 주장함과 동시에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불교의 폐단을 줄이려고도 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도로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한다. 이성계 세력이 권력을 잡자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고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또 유배 생활을 한다. 이성계의 끊임없는 출사 종용이 있었지만 끝내 고사하고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생을 마감한다. 문하에 충절을 지킨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왕조 건국에 공헌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된다. 정도전, 하륜, 윤소중, 권근 등이 그들이다. 변혁이나 혁명의 의미를 서로 달리 해석한 때문이었을까? 홍매화는 어떻게 붉은 꽃이 되었을까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한 임금이 매화꽃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매화라는 궁녀까지 총애하게 되었다. 이것을 시기한 신하들이 모의하기를, 매화가 역적들과 밀통해 임금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 매화는 참소를 받고 처형되었다. 매화꽃 때문에 궁녀 매화를 잃었다고 생각한 임금은 전국의 모든 매화나무를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어떤 시골에서 매화나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한 소녀가 몰래 매화나무를 길렀다. 발각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소녀는 이것이 일반 매화와는 다른 빨간 매화라고 우겼다. 신하들이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소녀는 매일 밤 손끝을 매화 가시에 찔러 피를 냈다. 꽃망울에 붉은 피를 흘려 붉은 기운을 넣기 위함이었다. 날마다 피를 흘린 소녀는 이내 죽고 말았다. 봄이 되자 놀랍게도 그때까지는 전혀 보지 못하던 홍매화가 피었다. 매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주로 충절이나 정절, 고결한 의지, 강직한 품성 등을 나타내는 데 소환되는 특급 콘텐츠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 동양의 시인묵객들이 매화를 노래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혹은 도자기 등의 예술품으로 표현했던 이유도 이런 심성을 흠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잉태와 모성의 여신성(女神性), 봄이 상징하는 재생과 부활의 에너지들이 응축된 콘텐츠라는 점 재론이 필요치 않다. 어찌 이것이 옛일에만 국한되겠는가. 마침 우리집 안마당을 둘러보니 설중매가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정초 한발의 서슬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봄이 아득하기만 하다. 문득 석양에 홀로 서서 갈길 몰라하는 목은을 마주한다. 눈 녹는 그 길에 대통령선거가 있다. 올해도 봄날의 정령 매화가 지천으로 필까? 정치로 말하자면 격조는 언감생심 차마 부끄러워 설중매를 거론할 수조차 없는 현실인데 말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살려고 안빈낙도를 꿈꾸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듯하다. 포은과 목은, 삼봉의 혈전들이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곤음의 시간, 그저 매일 밤 손끝을 매화 가시에 찔러 피를 내야 할 모양이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달리 해석하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봄의 전령 매화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는 무모함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퇴행이다. 매월당 김시습의 探梅 큰 가지 작은 가지에 눈이 모두 쌓였는데 따뜻한 기운 알아내고 차례대로 피는구나 고운자태 곧은 마음이라 비록 말이 없지만 남쪽 가지엔 봄의 정취 가장 먼저 어리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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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0)<br>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국에 걸쳐 유튜브 경매가 난리지만 나와는 관련이 없다. 아니, 유튜브 경매 자체를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팔불출이라고나 할까, 그런 문외한이 얼마 전 우연히 지방 경매를 들여다보게 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이다. 그러나 이 것은 팔기 위해 경매에 붙였던 것은 아니다. 경매사(사장)가 다른 물건을 진행하며 본인은 돈 안 되는 이런 것도 산다는 식의 에피소드로 잠시 보여 주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것을 전화를 해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엉뚱한 점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을 듯싶다. 전화를 통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 대해 엉뚱한 일을 벌린 것은 아무래도 평소 도편 중에서도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것을 선호한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나는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도편들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편이다. 젊은 시절 가마터에서 직접 습득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보이는 대로 욕심을 부린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소장품 중에서는 분청이 많고 청자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그런 아쉬움이 이번처럼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의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굽 안은 유약을 훑어내고 있으며 굽에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있다. 외면은 담청색의 유약이 두껍게 입혀져 있으며 평평하게 벌어진 몸체 밑 부분은 전으로 꺽이는 부분부터 손상을 입어 없어지고 없다보니 흡사 둥근 연못 중앙에 굽이 섬처럼 동그마니 떠 있는 모습이다. 안쪽을 보면 전으로 돌아가며 꺽였던 부분들이 깨어져 달아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중앙에는 두 줄의 백상감 안에 물고기 두 마리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눈동자만은 흑상감으로 점을 찍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바깥쪽으로도 두 줄의 백상감 원을 배치 중앙의 원과의 사이 여백에는 초화문을 넣고 있다. 초화문은 중앙에서 바깥쪽을 향해 방사선 형태로 줄기는 흑상감으로 꽃은 백상감으로 처리 흑백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유약과 흑백상감의 배치 등으로 보아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전국에 걸쳐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유튜브 경매에 대해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편이다. 고미술품은, 특히 도자기는 재화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그 것 못지않은 역사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적인 요소도 있기 마련인데 경매를 통해서는 현금 대상으로서의 즉물적인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서 보이는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고 해서 예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거나 방비하고자 하는 벽사의 의미가 강하며 많은 알을 낳는다고 해서 다산의 의미도 강조되고 있다. 새해 벽두에 만난 물고기 두 마리가 나를 건강으로부터 지켜주고 다산의 의미처럼 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그런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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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9)<br> 백자중첩편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를 소성하기 위한 가마는 일정한 공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것은 가마 안에 도자기를 재임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령 가마 바닥에 고급의 갑번이나 예번을 늘어놓았을 때 그 수량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급품이 아닌 하품이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그릇과 그릇 사이에 받침을 넣어 포개어 굽게 된다. 이 경우 굽은 물론이거니와 그릇 내저에도 흔적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받침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 것일까. 청자와 백자에서 쓰인 받침은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 우선 같은 종류를 보면 가는모래받침, 굵은모래받침, 내화토빚음받침, 모래빚음받침 등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청자에서는 규석받침이 있고 백자에서는 태토빋음받침이 있다. 청자에서 내화토+모래받침이나 백자에서 흙물+굵은모래받침 등도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받침을 이용해 포개어 굽는 과정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백자중첩편이다.굵은모래받침을 이용해 그릇을 포개어 굽고 있는데 그 수량이 무려 여덟 점이나 된다. 아래쪽에는 발 다섯 점이 틈 없이 들러붙어 있고 중간에는 흔적만 남은 것 그리고 위쪽으로는 완 안에 잔이 들어 있어 모두가 여덟 점이 되는 것이다. 유색은 회백색에 잔 안에 내저 원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C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백자충첩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흡사 청자의 잔탁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미소가 절로 머금어 지고는 한다. 받침 중에서도 백자중첩편에서 보이는 굵은모래받침은 지저분해 보이는 등 보기에 깔끔하거나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민과 싼값의 대량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갑번이나 예번이 지닌 수량의 한계, 이를 극복키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하면 나름의 의미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굵은모래받침의 백자중첩편이 그나마 들러붙고 깨지는 등 훼손이 심해 서민들의 손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좌절한 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도자기 중에서 갑번이나 예번 등 상품만이 사랑 받는 존재였겠는가. 하품이기는 하지만 백자중첩편이 온전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이 또한 그들에게서 애지중지 사랑 받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래서인지 끝내 제 몫을 못하고 좌절한 백자중첩편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고급품에서 느끼는 저 특별한 미감과는 달리 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쓸쓸하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느껴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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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사인(先史人) 주거지로 추정되는 ‘바위그늘 유적’ 발견향토사연구원 이만유 낙동강 상류 금천(錦川)이 흐르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에는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필자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2020년 4월 2일 ‘청동기시대 상징 고인돌, 성혈(性穴) 또 발견’이란 제목과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 남근석(男根石)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이란 부제를 달아 언론에 보도한 바가 있는데 이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행정당국에 보존 대책을 건의한바 관련 부서에서 현지 확인하고 보존 가치와 청동기 유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난 1월 13일 고고학 전문가이신 세종문화재연구소 유병록 박사를 모셔서 현지 조사를 할 때 필자도 동행하였다. 이날 왕태리 청동기 유적 현지를 보고 난 뒤, 유병록 박사와 여운황 문경시 문화예술과 문화재관리팀장과 함께 금천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기존 청동기 유적을 탐방하기로 하여 필자가 현지로 안내하였다. ‘연소리 대형 성혈석’ ‘ 녹문리 성혈석 군집지’ ‘현리 성혈석 너럭바위’ ‘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천변 현리 야산 남쪽에 있는 대형 바위를 살펴보든 유병록 박사께서 "암음(岩蔭-바위그늘)이다”하는 외침이 있었다. 깜짝 놀라 셋이 모여 움푹 들어간 바위 밑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도자기편(분청사기, 백자)과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었다. 선사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나 지형이 덮이고 묻혀있어 그때와는 지금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으므로 쉽사리 ‘암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과연 이곳 대형 바위와 그 주변이 선사시대인들의 주거지인‘바위그늘’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발굴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바위그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바위그늘유적’은 동굴유적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존재하는 대형 바위 아래 그늘을 이용한 선사인들의 주거지다. 자연 절벽에 그늘이 진 곳, 풍화작용에 의해 오목하게 형성된 곳, 하천이나 바다의 절벽에 파식작용에 의하여 움푹 파인 곳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고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남쪽으로 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늘 내부와 그늘의 트인 앞에 선사인들이 사용한 유물이나 생존을 위해 취했던 동·식물 등을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위그늘유적’이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곳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부산 금곡동 율리, 경북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유적 등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적이 외국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주로 발견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삼국,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문경에서 ‘바위그늘유적’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얼마 전 중부내륙고속철도 문경읍 마원리 문경역 주변 공사장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소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경지역의 역사가 청동기시대에 머물다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확실하고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분포된 금천 일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전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집단 거주지다’라고 말해 왔는데 이곳의 대형 바위가 발굴 과정을 거쳐 ‘바위그늘’로 최종 확정되는 결과가 나온다면 필자의 추정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하루빨리 당국에서 ‘현리 바위그늘 선사유적’ 발굴 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묻혀있는 역사가 햇빛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아울러 필자가 이제까지 주장해 온 문경시 전체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성혈석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 대책도 함께 세워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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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28)<br> 백자청화시문접시편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에서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시문(詩文)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근래 들어 시가 위축되고 있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 육경 중에서도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던가,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등은 모두가 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거창한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자기에 시문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멋이요 풍류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문은 청자나 분청에서 상감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백자에서는 청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백자에 청화로 시문이 들어간 것으로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자 전접시에 술을 주제로 하여 청화로 칠언시를 종으로 써내려 간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溪月泠陶令醉 대나무 계곡에 달빛이 차가운데 도연명이 취해 있고 花市風香李白眼 꽃 사랑의 향기로운 바람 속에 이백이 잠들었네 到頭世事情如夢 세상사 돌아보면 품은 정은 꿈만 같고 人間無慾似樽前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동이 앞에 있는 것 같네 이러한 백자청화시문편은 경기도 광주 도마리 1호와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도 출토되고 있음은 물론 관청 건물지 터 등에서도 수습되고 있어 이 시기 일종의 멋과 풍류로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자에 시문이 들어간 것은 초선 초기뿐이 아니라 17~19세기로도 이어지는데 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초기의 접시와는 달리 병 호 문방구 등으로 널리 확대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금사리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18세기 전반 것인데 이 시기는 임란란 후 거의 사라져 버렸던 청화가 되살아나며 가장 한국적이며 사대부의 문인 취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이 시기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작은 조각만 남은 데다 청화로 쓰여진 시문 또한 설유국(雪濡菊) 시화니매(是花尼梅)의 일곱 글자만 남아 있어 시의 제목이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화나 매화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기존에 알려진 백자청화시문명 도자기들이 대개 그렇듯이 술과 관련된 한시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금사리는 도자기 가마터 중에서도 내게는 꽤 친근한 이름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아 여러 번 찾아보아 익숙한 점도 있거니와 금사리 시기 백자청화에서 보이는 저 추초문 같은 절제된 미감이 내 마음 속에 깊이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답사를 통해서도 추초문 같은 청화는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지금 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그런 가운에 작은 조각에 글자도 몇 자 안 남은 백자청화시문접시편에서 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듯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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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6)<br> 청자용머리편즐겁고 신나고 안복 또한 이규진(편고재 주인) 2024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대화 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맘때만 되면 작심삼일로 공수표를 남발할망정 누구나 한 번 쫌은 일 년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다짐해 보기도 한다. 더구나 금년의 갑진(甲辰)은 육십간지의 41번째로 푸른색의 갑(甲)과 용을 의미하는 진(辰)이 만나 청룡(靑龍)의 해가 되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꿈과 희망에 가슴 부푼 한 해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은 신화와 전설, 무속과 민속, 종교와 풍습, 역사와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연관을 맺고 있다보니 그 도상(圖像)도 다양한 편이다. 그런 가운데 용은 도자기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특히 조선 백자에서 흔히 보이고 있는 청화로 그려진 것은 그 자체로 청룡이다 보니 갑진년 새해에 꼭 어울리는 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도자기에서 용은 백자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국보 제61호로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청자어룡주전자(靑磁魚龍形注子)와 국보 제259호로 몸통에 용무늬를 새기고 있는 분청사기구름용무늬항아리(粉靑沙器象嵌龍文立壺)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청자나 분청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자용머리편(靑磁龍頭片)이 내게 와 있는지는 꽤 오래 되었다. 그러면서도 늘 궁금했던 것은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몸체는 없고 머리만 남아 있다 보니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기존에 알려진 도자기의 용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쩍 벌어진 입과 날카로운 잇빨, 부릅뜬 눈과 작은 귀, 그리고 그 사이로 뻗어 있는 쁠 등 용머리의 모습은 확연하지만 뒤로 이어진 부분들이 잘려 나가 전체적인 윤곽을 짐작해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비색과 남아 있는 형태의 정교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청자가 아닌 명품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용머리편, 청자도 따지고 보면 푸른색이고 보면 청자용머리편 또한 청룡(靑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갑진년 청룡의 해에 청룡의 청자용머리편을 소개하는 뜻은 세상의 모든 분들, 특히 도자기를 사랑하고 애호하는 모든 분들이 이 세상의 온갖 시름을 내려놓고 금년 한 해만큼은 즐겁고 신나고 안복(安福) 또한 넘치게 누릴 수 있는 그런 날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뜻에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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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비 다스리는 변화무쌍한 존재…2024년 비상하는 '푸른 용'(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다사다난했던 2023년이 저물고 2024년 갑진년(甲辰年), 푸른 용의 해가 새로 밝았다. 용은 12가지 띠 가운데 유일하게 세상에 없는 상상의 동물이다. 낙타 머리에 사슴뿔, 토끼 눈, 소의 귀, 뱀의 목, 개구리 배, 잉어 비늘, 매 발톱, 호랑이 발을 가졌다고 하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왔다. 서양에서는 주로 불을 내뿜는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동양 특히 동아시아권에서는 생명의 근원인 물을 관장하며 하늘로 승천해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어왔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는 "서양에서 용은 주로 퇴치해야 하는 존재로 나타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상서롭고 신령한 동물로 인식해왔다"고 설명했다. 무덤 벽화부터 그림, 도자기 등 문화유산 곳곳에서 용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선사고대관에서 전시 중인 국보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는 금 알갱이 수천 개와 금실로 용을 표현한 낙랑 시대 유물이다. 길이 9.4㎝, 너비 6.4㎝의 고리에 총 7마리의 용이 담겨 있는데, 용과 용 사이에는 꽃잎 모양의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청록색 보석을 추가해 화려함이 돋보인다. 동쪽을 수호하는 청룡을 그린 강서대묘(江西大墓)의 그림, 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담은 용무늬 벽돌, 용 모양 청자 향로와 항아리 등도 주목할 만하다. 위엄있고 당당한 용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는 궁궐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상징사전에 따르면 용은 예부터 왕이나 황제 같은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기도 했다.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를 뜻하는 표식인 셈이다. 왕이 일할 때 입는 곤룡포(袞龍袍)에는 금실로 용 무늬를 수놓았고,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인 경복궁 근정전 천장에는 용 두 마리를 금빛으로 그려 넣었다. 덕수궁에서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던 중화전 천장에도 용 조각이 장식돼 있다. 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서 출토된 청동용은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경회루의 건축 원리를 설명한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 등에 따르면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동(銅)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의 북쪽에 넣었던 것으로 전한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청동 용의 고사문에는 불의 신을 백겁 동안 가두고, 천리로 배웅하며 물의 기운을 머금었다가 내뿜어 영원토록 궁궐을 보호해달라는 기원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2001년 근정전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수'(水) 부적 역시 궁궐에서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며 '용'(龍) 자를 1천번 넘게 쓴 흔적으로, 두 유물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오늘날에도 용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하고, 용이 나오는 꿈은 훌륭한 자식을 낳는 최고의 태몽이나 길몽으로 여기기도 한다. 십이지(十二支) 동물 가운데 지명으로 가장 많이 쓰인 동물도 용이다. 2021년 국토지리정보원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용과 관련한 지명은 1천261개로, 호랑이(한자 '虎' 사용) 관련 지명 389개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용의 머리를 닮았다거나 용이 누워있는 모습에서 유래된 지명 등이 해당한다. 한국민속상징사전에 따르면 '푸른 용'(청룡)의 뜻을 담은 지명은 전남 고흥군 도화면 청룡마을 등 전국 19곳에서 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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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물리치는 강력한 존재…중앙박물관서 용의 기운 느껴볼까(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조선시대 사람들은 용이 다섯 가지 복을 가져오고, 호랑이가 세 가지 재해를 몰아낸다고 믿었다. 용과 호랑이 그림이 나란히 걸린 이유다. 정월 초 궁궐이나 관청 대문 등 건물 입구에 붙인 그림은 한 해 동안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다가오는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를 맞아 박물관에서 용을 만나보면 어떨까. 국립중앙박물관은 27일 상설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용 관련 그림, 조각, 도자기, 공예품 등 유물 15건을 소개했다. 용은 십이지(十二支) 동물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자 초현실적인 존재다. 예부터 재앙을 물리치는 신령한 존재로 여겨졌고, 왕이나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특히 청룡은 동쪽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전한다. 용은 오래전부터 위엄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표현돼 왔다.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용무늬 허리띠 고리(정식 명칭은 국보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에서는 총 7마리의 금빛용을 찾을 수 있다. 금판을 두들겨 허리띠 고리를 만든 뒤, 표면을 금 알갱이 수천 개와 금실로 장식한 이 허리띠 고리는 낙랑 시대 유물 중에서 최고로 꼽힌다. 고구려 고분인 강서대묘(江西大墓)의 '청룡도'는 널방 동쪽 벽에 그려진 그림으로, 동서남북에서 죽은 자를 지키는 사신(四神)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1층 중·근세관에 있는 고려시대 청동 범종은 용 한 마리가 오른쪽 앞발로 바닥을 딛고 왼쪽 앞발을 치켜든 채 꿈틀대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통일신라 종의 용 장식은 두 발과 입을 종에 딱 붙인 모습이었는데, 고려시대가 되면 용이 머리를 치켜들고 앞발을 들어 올리며 더 역동적인 모습이 된다"고 말했다. 권력의 중심, 왕을 상징하는 물건 곳곳에도 용이 깃들어 있다. 왕이 입는 옷에는 금실로 용 무늬를 수놓았고, 허리띠도 용으로 장식했다. 1897년 만들어진 국새 '칙명지보'(勅命之寶)는 손잡이를 거북이에서 용으로 바꿔 대한제국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려 한 점이 특징이다. 상서로운 용의 모습은 그림과 도자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2층 서화관에서는 바다에서 나온 용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담은 그림부터 정월 초 호랑이 그림과 함께 문에 붙였던 용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 유족이 기증한 '고사인물화보첩'에 담긴 '용과 봉황을 탄 선인' 그림은 밤하늘을 나는 황룡과 봉황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밖에도 흰색 용이 몸을 틀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담은 청자 상감 항아리, 백자의 흰 면에 푸른색으로 용 두 마리를 그려낸 항아리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QR 코드를 활용하면 각 전시품의 위치와 목록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각 전시품 옆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면 세부 부분이나 보이지 않는 뒷면, 비교할 만한 다른 작품,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아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좋은 운을 가져오는 특별한 용을 만나보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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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상징사전' 용 편 발간국립민속박물관은 2024년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를 맞아 '한국민속상징사전'의 용 편을 발간했다고 18일 밝혔다. 한국민속상징사전:용'은 다가올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아 용과 관련한 민속과 풍습을 소개한다. 주몽과 박혁거세 등 건국 신화부터 속담까지 한국 민속문화 속 용의 다채로운 모습과 상징을 집대성했다. 신앙, 설화, 놀이, 그림, 건축, 복식, 풍수로 범주를 나눠 용에 대한 관념과 상징을 조망할 수 있도록 체계적 정리했다. 그림, 도판 등 시각 자료를 함께 수록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용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하여 신령스러운 능력을 가까이 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복식, 건축, 그림, 도자기, 가구 등 여러 분야에서 용 문양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지붕에 용마루를 설치하고 기와에는 용두(龍頭) 모양을 장식하여 화재를 막고 벽사를 나타내었다. 정초에는 용호(龍虎) 그림 및 문자를 대문에 붙여 재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였으며, 마을을 상징하는 농기에 용 그림을 그려 풍요를 희망하였다. 또한 문방사우(文房四友)나 문자도(文字圖)에 용 문양을 장식하여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출세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중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된다는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는 ‘입신출세’의 뜻을 지녀 격려와 응원의 의미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2024년에는 ‘청룡’의 힘을 빌려 고난과 역경을 잘 이겨내고 바라고자 하는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 한국민속상징사전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folkency.nfm.go.kr)이나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www.nfm.go.kr)에서 공개하고 원문 자료도 내려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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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개의 친밀감에 대하여개가 얼마나 친밀한 존재이고 심성적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몇 차례 장그르니에를 인용해 소개한 적이 있다(장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민음사, 1997).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개의 부류는 '친밀감'을 속성으로 한다. 인간의 친구인 개, 인간이 얻은 가장 고상한 피정복물 아니 지금은 동맹관계로 바뀌어버린 말(馬), 흔히 무고한 희생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기까지 하는 비둘기, 이 동물들만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없다. 토끼를 비롯한 다른 몇 동물들도 이 부류에 포함 시킬 수 있을까. 인간은 친밀감을 열망한다. 이는 친구로서의 남자, 어머니로서의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친밀감이라는 것이 대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한 이들 사이에서도 반목은 일어날 수 있다. 이 부류의 동물들이 지닌 특성은, 인간이 함부로 인간만의 속성으로 분류해놓은 '인간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온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개(犬)적인 온정'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럴까? 그르니에가 말하는 '개적인 온정'이라는 것이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개 같은~'이라는 비하적 언설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개(犬)적인 온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인간적인 본연의 온정을 찾는 길이라는 둥 피상적인 심리 정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질문해보면 문제 제기가 좀 더 명료하다. 이 온정을 붙들어두기 위해 고안한 것이 개목걸이일까? 고양이의 거리감으로부터개에 비해 고양이의 부류는 '거리감'을 속성으로 한다. 장그르니를 다시 인용한다. "이 고양이의 부류에는 원숭이와 앵무새도 포함된다. (때때로) 우리의 찬탄을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이 동물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게다가 뷔퐁의 생각처럼, 이 부류의 대표격인 고양이가 우리에게 애정의 몸짓을 보이기는커녕 우리를 이용해 제 몸을 쓰다듬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도저히 이 녀석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사람의 흉내를 내도 (그 거리감은) 좁혀질 수 없다. 앵무새는 목소리를, 원숭이는 몸짓을 흉내 내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녀석들은 우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식물이 우리와 가깝다. 결국 생활 방식은 친밀감과 거리감이라는 양극으로 특징 지어진다. 결합을 도모하는 것과 결별을 꾀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심성'과 '지성'이라는 양극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성'과 '지성'의 경계를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단지 애착으로 결합하는 것들과 냉담하게 이탈하는 것들을 대립시킬 뿐이다. 로마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처럼, 지평선 위로 수직선을 그리며 홀로 자라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처럼 모여 조화를 이루는 나무들도 있다. 뾰로통하고 새침한 고양이, 그 이지적 지성에 비해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영혼 모두를 우리에게 의탁하는 개의 무구한 심성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인류가 태고이래 고안하고 재구성하며 천착해왔던 신(神)에 이르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엠비로스 비어스는 우리 누구보다 먼저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괄호는 가독(可讀)의 편의를 위해 내가 추가한 것이다. 지면상 인용한 컨텍스트를 일일이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개는 심성적이고 고양이는 지성적이라고. 재차 질문해둔다. 반려견 혹은 반려동물에게 채우는 목걸이는 이 거리감 혹은 친밀함과 관련된 것인가? 혹은 사람들의 (주로 여성들이 거는) 목걸이조차도 이 친밀함이나 거리감과 관련된 장식들인가? 반려동물 목걸이의 문화사이주은이 지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파피에, 2019)를 통해 고대풍속의 편린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기원전 1401년부터 기원전 1391년의 이집트, 왕실 부채 관리인 마이헐프리라는 사람이 24세쯤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에서 유리잔, 도자기, 화살통 2개, 화살 75개, 고기, 빵과 더불어 개목걸이 2개가 출토되었다. 선인장 꽃과 말들이 그려진 개목걸이에는 황동 단추가 장식되어 있었다. 다른 목걸이에는 아이벡스(커다란 뿔이 있는 야생 염소의 근연종)와 가젤을 사냥하는 개들이 그려져 있고, 개의 이름 '탄타누트'가 새겨져 있었다." 탄타누트는 이집트에서 일반적으로 여성 이름이었다. 평자들이 이 개목걸이의 주인을 암컷 사냥개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왜 개의 목걸이에 황동단추가 장식되었으며 여성의 이름을 새겨 넣게 되었을까? 애완견 혹은 반려견의 역사적 맥락들을 살펴보면 여성 비하와 동물 비하의 행간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제기하는 질문이다. 애완견이 너무도 사랑스러웠기에 지어준 명예로운 이름이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이주은은 이렇게 설명한다. "목줄이나 목걸이가 제재용만이 아니라 오히려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사례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에서는 세베리누스라는 소년의 개였던 델타가 특별한 목걸이를 차고 다녔다. 용암과 화산재가 쏟아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꼬마 주인을 보호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목걸이에는 바다에 빠질 뻔한 주인을 구해준 일, 강도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 일, 다이애나 여신의 땅에서 늑대에게 공격당한 주인을 살린 일이 새겨져 있었다. " 켄돌란 델 베치오는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에서 또 이렇게 소개한다. "왕족들도 그러했지만 프랑스의 샤를 5세의 개는 진주와 루비가 장식된 벨벳 목걸이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개에게 진주목걸이와 금목걸이라니! 표현의 결이 달라서 그렇지 반려대상으로 삼은 이들에게 '개목줄'이라는 평상의 비하적 언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쯤 해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왜 반려동물 목줄을 목걸이에 비유하는지를. 이 이야기는 올 초, 소의 해 씨압소 전통을 말하면서 언급했던 쇠코뚜레와 수많은 고분에서 산견되는 목걸이로 상고해 오른다. 오늘은 지면이 다하였으니 차차 소개해나가기로 한다.반려동물 목줄에 대한 명상목줄이나 목걸이도 소의 코뚜레처럼 상징적이거나 민속신앙적인 것일까? 이를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관념들 아니면 해명되지 않는 무의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밝혀질지도 모른다. 마치 쇠코뚜레를 벽에 걸어두고 벽사진경(辟邪進慶), 즉 악한 것을 막아내고 좋은 것을 불러들이는 금기나 풍속으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개를 길러 문지기 삼고 개그림을 그려 대문에 걸었던 것처럼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 어떤 관념이나 신앙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개가 집안의 지킴이 특히 여성 등 위약자의 지킴이를 넘어 죽은자의 영혼을 지키는 신앙물로 나타나겠는가 말이다. 켄돌란 델 베치오는 이렇게 말한다. "낸시와 저는 많은 성인 남녀들로부터 떠나보낸 반려동물의 봉제 인형이나 목줄, 목걸이가 있어야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고백을 들었어요." 그래서다. 나는 이 목걸이를 보다 더 근원적인 무의식까지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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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1)<br> 청자사자형문진편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에서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는 아주 보기 드문 동물은 아니다. 주로 향로나 베개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하다고나 할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형뚜껑향로(靑磁獅子形蓋香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의 것으로는 근래 들어 눈길을 끌고 있는 청자사자형뚜껑향로 2점이다. 2007~2008년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수중발굴을 통해 출수된 것으로 지금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보물 청자사자형뚜껑향로는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앞발은 두 개의 보주를 밟고 있다. 몸에는 소용돌이 털이 새겨져 있고 벌린 입 사이로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내민 혀가 보이고 있다. 다소 파격적이고 거칠게 표현된 형상은 세련된 조형성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이질적이며 해학적인 자태는 고려인들의 또 다른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것이어서 여간 흥미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뚜껑향로가 보물로 지정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간 등을 통해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출수된 도자기들이 강진에서 만들어져 개경으로 가다 난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작 시기와 출토지 및 사용처를 분명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해학적이고 독특한 조형미,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산예출향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 고려청자의 다양성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 제60호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사자형뚜껑향로의 사자가 모두 향로의 뚜껑이고 여타의 사자들이 베개와 같은 유물들에서 장식용으로 몸체에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청자사자형문진편(靑磁獅子形文鎭片)은 이런 것들과는 유형을 달리 하고 있어 주목된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은 현재 몸체의 앞부분만 살아 있고 뒷부분은 망실되고 없다. 말하자면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 부분이 훼손되고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은 형체만으로도 어떤 기물에 부착시켜 장식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사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의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무척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크게 벌린 입으로는 가지런한 이빨이 보이고 들창코 같은 코에 튀어나온 두 눈알에는 검은 점을 찍고 있다. 옆으로는 소용돌이 모양의 갈기 흔적이 보이고 머리 위로는 없어진 뒷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꼬리 일부분이 붙어 있다. 거기에 온몸에는 비색의 유약이 두텁게 입혀져 있다. 반 토막이 나 앞부분만 살아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어떤 기물에 장식용으로 붙어 있던 것이 아닌 독립된 한 마리 사자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편리한대로 청자사자형문진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보기 좋게 청자로 만들어진 장식용 사자였을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특수한 형태의 것이어서 주목을 요하는 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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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의 수중문화유산 보존 학술회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배)는 오는 20일 오후 1시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전남 목포시)에서 '한·아세안 수중문화유산 보존처리 사례와 현황'이라는 주제로 학술 토론회를 개최한다.이번 콜로키움은 우리나라와 아세안 국가의 수중문화유산 보존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각 국가의 보존처리 사례와 현황, 향후 방향 등 연구 성과를 논의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행사는 총 6개의 주제발표로 구성되며,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수중문화유산 보존처리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알아보는 ▲ 과거의 보존: 필리핀 수중문화유산 보존 현황(Rachelle A. Geline, 필리핀 국립박물관), ▲ 태국의 수중문화유산 보존과 노력(Wongsakorn Rahothan, 태국 미술문화부), ▲ 태국 고선박 파놈 수린(Phanom-Surin)선의 보존처리 및 과학적 분석연구(Natchaya Pattanasuttir at, 태국 미술문화부), ▲ 인도네시아 수중문화유산의 현재, 도전과 기회(Nia Naelul H. Ridwan, 인도네시아 해양수산부) 순으로 발표가 진행된다. 이후, 에너지절감 등 친환경적인 수중문화유산 보존관리 환경조성을 위한 ▲ 지속가능한 수중문화유산 보존·관리를 위한 노력(김서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현재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 중인 신안선의 보존상태를 분석한 ▲ 전시 중 고선박의 보존관리(서수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발표를 통해 국내의 사례도 함께 살펴볼 예정이다. 신안선은 1975년 어부에 의해 발견된 중국 원나라 선박으로, 도자기와 각종 공예품 등이 함께 인양됨. 보존처리 후 실물 복원된 신안선 선체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내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유물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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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7) <br> 청자사자향로뚜껑편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일찍이 고려의 개경을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비색(翡色)이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는데 그 대상이 비색소구(翡色小甌) 과형주존(瓜形酒尊) 산예출향(狻猊出香)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산예출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산예출향 역시 비색이다.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벌어진 연꽃 문양이 이를 받치고 있다. 여러 물건 가운데 이 물건만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산예란 원래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 연기를 좋아하여 앉아 있기를 잘하고 사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하면 산예출향에 걸 맞는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산예출향에 근접한 것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蓋香爐)다. 뚜껑은 사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를 받치고 있는 대좌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 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 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고 있다.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과한 후 벌려진 입을 통해 내뿜도록 된 구조다. 이 청자사자유개향로는 기형도 기형이지만 유색 또한 비색으로 맑고 깔끔하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주목해 볼만한 상품의 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예출향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가 한 점 있다. 향을 피우는 몸체는 없지만 둥근 받침 위에 향의 연기를 뿜어내게 속을 비운 사자 형태를 하고 있는 청자 뚜껑이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와 동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색도 녹청의 비색이 곱게 입혀져 있어 서긍이 언급한 비색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색감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손상이 있어 수리를 했던 것이다. 도자기 수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손상 부분을 알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충 보아서는 아예 모르도록 정교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후자 쪽으로 이른 바 호마이카 수리라고 해서 고가로 수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점이 못마땅한데다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있는 것인지 궁금도 해 수리 부분을 모두 제거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래턱이 없어지고 꼬리부분이 잘려 나갔는가 하면 다리와 엉덩이 쪽에 뚫린 부분이 있었다. 사자를 지탱하고 있는 받침 부분은 훼손할 수가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여기에는 돌려가며 장식한 음각의 뇌문이 보이고 있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의 수리한 부분을 제거한 후 나는 몹시도 즐거웠다. 그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손상이 적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원형의 받침대 위에 몸을 세우고 있는 사자는 금방이라도 사자후를 토해낼 듯 당당하고도 위엄이 있는 모습이 아닌가. 거기에 유색 또한 비색을 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즐겁고도 감사한 일이랴. 소장 중인 적지 않은 도편 중에서도 그야말로 애지중지해야 할 귀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자는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중국도 서식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우리나라 공예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의 관련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향로편 또한 예외는 아니어 불단에 향을 피우기 위해 만들어진 기물은 아니었을까. 비록 향을 피우던 몸체는 없어지고 향을 뿜어내던 사자 뚜껑은 손상이 있지만 그래도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을 보고 있노라면 현세와 내세에 대한 염원이랄까 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형태와 빛깔로 나타난 듯싶어 마음이 숙연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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